
대담 김현택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명예교수
올해로 조로통상수호조약 체결 수교 140주년을 맞는다. 이보다 앞서 우리 동포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처음 이주한 시기로부터는 160년이 흘렀다. 한인 정착 마을에 정교회 사원이 등장했고, 러시아 시민권을 받으면서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1900년에는 서울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 관저에서 한국 최초의 정교회 성찬 예배 의식이 거행됐다. 러시아 신성종무원이 1887년에 한국 선교부 설립 결정을 내린 후속 조치였다. 이후 러시아 정교회 한국 선교의 역사는 순탄치 않은 굴곡을 경험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선교단이 일시 한국을 떠나야 했고, 선교 활동이재개되어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할 즈음에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발발했다. 본국 정부의 지원이 완전히 끊긴채 어렵사리 활동을 이어가던 선교부는 해방 후 마지막까지 서울에 남았던 사제가 강제 추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49년까지 러시아 정교회 선교센터로 사용되던 정동 소재 부지는 그 후 한국의 국유재산으로수용됐다가 복잡한 재판 절차를 거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소속으로 이전됐다. 원래 있던 선교센터를 떠나마포 애오개역 인근에 자리 잡은 성 니콜라스 성당은 한동안 한국 유일의 정교회 공동체였다. 1990년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인들이 한국을 찾기 시작했고, 현재는 장기 체류자 숫자가 5~6만을 헤아린다. 여기에 구소련 공화국 출신 고려인 동포까지 합하면 한국 내 러시아어 사용 인구의 숫자가 적지 않다. 따라서 러시아어권 정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2000년에 페오판 김사제를 선교 출장으로 서울에 파견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교회 성찬 예배를 거행한 지 꼭 100년 만이다. 2019년에는 남·북한을 포괄하는 정교회 대한 교구를 설립하고 페오판 대주교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가 서울에서 강제 추방된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사할린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오판 대주교는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한반도 남북 양쪽 출신의 부모님을 두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주춤했던 선교 활동에 최근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를 만나, 한국 내 러시아 정교회 선교 역사와 현재 상황, 선교 활동의 주요 방향들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정교회 신자로 입문하여 사제의 길을 결심하게 된 배경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마음가짐 등을 허심탄회하게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삼각지역 인근의 그리스도 부활 성당을 찾아간 10월 14일이 마침 성모 축일이어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 신자들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정교회 신앙이 그다지 확산하지 않았던 소련 시절에 교회에 입문했다. 어떤 계기로 정교회에 관심이 생겼고, 또 사제의 길을선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소련 시대에 태어났다. 사할린섬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자랐는데 소련식 교육을 받았고 모두 그랬듯 공산소년단원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국가가무신론을 선전하던 때였으니 종교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사할린섬 전체에 교회는 하나도 없었고, 나중에야 도시 외곽에 자그마한 교회가 들어선 게 고작이었다. 어린우리는 신이 없다고 생각했고, 도서관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자식 교육에 혹여 도움이 되려나 해서 무신론 관련
책 두어 권을 가져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어느 스포츠 클럽에 가입했는데, 클럽 대표자 되는 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신자였던 그분이 정교회 신앙에 대해 조금씩 얘기를 해줬는데, 열일곱 여덟 나이의 청년이었던 나는 예의상 듣는 체했다. 하루는 책 두 권을 내게 내밀며 한번 읽어보라고했다. 성경 말씀과 교부들의 기록을 일부 발췌한 도서와20세기에 살았던 성자인 축복받은 마트료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는 도중 뭔가 마음에 깊이 다가왔고, 거기에 적힌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그 후 세례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규모가 큰 정교회 사원이 건설되고 있었다. 세례를 받은 후부터는 마음이 늘 성전에 머물러있었다. 거기에 가면 내 영혼의 부름에 응답하는 소중하고 올바른무엇을 늘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에 몰두했고, 성직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는 자신의 삶을 교회와 연결해야겠다는 생각도 또렷해졌다. 그런 확신에 이른건, 교회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던 이들과 전혀 달랐고, 그들의 눈빛에서 친절함이 느껴졌으며, 교우들 사이의 관계또한 지금껏 알던 인간관계와 완전히 달라서였던 것 같다. 특히 성직자 몇 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이 내면적으로 얼마나 충만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인지 깨달았고, 나도 그들을 닮고 싶었다. 대학 졸업 후 스물한 살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사할린은 러시아에서도 특별한 공간이다. 외따로 떨어진 섬이고 일본이 지배할 때는 우리 동포들이 강제노동에 끌려가기도했다. 아나톨리 김의 단편집 『푸른 섬』은 여기 살던 사람들의 애환 어린 삶을 다루었고, 한국계 조각가 아나톨리 니가 제작한 체호프 흉상도 사할린에 가면 볼 수 있다. 고향 사할린은 어떤 곳인가?
사할린주는 사할린섬과 쿠릴열도를 포함한다. 사할린남부 지역은 한동안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고, 그 시기에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왔다. 주로 한반도 남부 지역 출신이었는데, 나의 어머니도 본인이 사용하는 말투가 전라도 억양이라는 걸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극동으로 이주한한반도 북부 출신의 후손이다. 사할린은 이처럼 고향을등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본토의 중심으로부터 아주 먼 이곳 사람들의 삶은 차분하고 절제된 것이 특징이다. 자연 역시 독특하고 아름답기 짝이 없는데어린 시절에 산과 강, 호수와 바다로 하이킹을 간 기억이눈에 선하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이 섬의 문화에 특별한 풍미를 더해준다. 어딜 가나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사할린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동포들도 만날 수 있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은 일반적으로 재능 있고성실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고, 저명인사들도 꽤 많다. 사할린 교구의 초대를 받아 5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하는 이 고향 땅을 정말 사랑한다.
정교회 사제가 되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나.
러시아에서 정교회 사제의 길을 가려면 지금은 반드시신학교를 마쳐야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결혼한 사제로 일할 것인지 아니면 수도사로 봉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이 선택을 해야만 안수를 받게 되는데, 나의 경우는 좀 달랐다. 1990년대 말은 소련이 해체되고 국가의 기초가 무너진 시기였다. 그때까지 믿던 이데올로기가 허구로 드러나자, 사람들은정신적 공백 상태에서 영적인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많은 밀교와종파가 번성했다. 정교회 사원들도 속속 문을 열었다. 정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크게 늘었고, 성직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직자 안수 요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신학교 졸업생이 아니어도 신자들 가운데사제 안수를 받을 만한 후보를 선발해서 사제직에 임명했다. 나는 이런 경로로 사제가 됐는데, 정규 신학교 교육은 나중에 사제가 되고 나서 받았다.
대한 교구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에도 한국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2019년 대주교로 부임하기 전에는 어디서 근무했는가?
사할린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스몰렌스크로 갔다. 러시아 영토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중 하나인데, 말하자면 러시아 영토의 동쪽 끝에서 최서단으로 간 거다. 스몰렌스크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스몰렌스크시의 대성당에서 봉사했다. 그다음에는 시베리아의 하카시야 공화국으로 떠났다. 사제로 일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러시아 중심부에 있는 옵티나 푸스틴, 디베예보, 세르기예프 포사드 같은 성지들도 찾아갔다. 러시아는 워낙 광대한 나라인지라 요즘도 러시아에 가면 새로운 지역을 둘러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곳에 갈 때마다낯설고 독특한 모습에 놀라곤 한다. 다양한 민족이 함께사는 러시아는 정말 흥미로운 나라다. 가는 데마다 기후가 다르고, 삶의 양식과 문화 또한 다채롭다. 작년에는타타르스탄과 카잔을 처음 찾았고, 올해는 마리옐 공화국의 수도인 요시카르올라에 다녀왔다.
내년이면 러·한 수교 35주년이 된다. 수교를 계기로 러시아인들의 한국 방문이 잦아졌다. 일반인들과 함께 엔지니어, 교사, 학생, 음악가 등이 왔고, 한국에 러시아인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울의 마포구 애오개역근처에 있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소속 성 니콜라스사원이 전에는 한국 유일의 정교회였다. 따라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고, 당시 이 본당 책임을 맡고 있던 소티리 대주교가 모스크바총대주교청에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제의 파견을 요청했다. 그래서 2000년에 선교 출장으로 내가 서울에 파견됐다. 그때 2년 동안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땅에 러시아 정교회가 첫발을 디딘 100주년이 되는 해에 서울에 왔던 셈이다.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첫 전례를 집전한 건 1900년의 일이다.
2000년에 선교 출장으로 서울에 파견됐는데,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땅에 러시아 정교회가 첫발을 디딘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에 왔던 셈

러시아 출신 한국인으로 여기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동안 문화적 차이나 소통 방식이 달라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얼굴은 한국 사람이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사고방식은 당연히 러시아식이었다. 낯선 한국 문화에 몰입하는 게 큰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이곳 분위기에꽤 익숙해져서 당황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처음에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까다로운 일을 겪기도 했다.유럽이나 러시아와 달리 한국은 위계질서가 강한 문화가 있다. 누구와 소통하려면 그 사람의 위치나 지위를 알아야 했는데 그게 영 쉽지 않았다. 러시아나 유럽에서는정중한 태도와 말투를 유지하면 되니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인관계에서는 위계적 구조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난다. 정말 어려웠던 건 상대방의 지위를 파악하는 것 외에 자신을 이 위계적 구조의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직자라는 신분 덕분에 한국인들이 나를 정중하게 대해줬기에그나마 얼마간 수월했던 것 같다.
시베리아에 있는 투바 공화국에서 주교로 활동했다. 그곳의 대표적인 종교는 불교로 알고 있다. 이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전통 신앙과 정교회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
앞서 말했듯 러시아 영토 내에는 서로 다른 삶과 문화의 공간들이 공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중심부, 즉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신자들이 다수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타타르스탄, 다게스탄, 체첸 같은 무슬림 공화국이 있고, 불교 신자가 주류를 이루는 공화국도 있다. 칼미키야, 부랴티야, 투바 공화국 등이다. 2011년에 투바 공화국의 주교로 임명을 받았는데, 전체 인구의 90%가 현지인으로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독특한 곳이다. 약 10% 정도가 정교회 신자다. 투바 공화국은 다른 지역보다 뒤늦게 소비에트 연방에 합류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정교회 사원이 거의 없었다. 1944년에야 소련에 통합됐기 때문에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고, 언어와 신앙, 문화 전통 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샤머니즘이 크게 우세한데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 두 종교가 혼합된 방식으로 존재한다. 정교회 신자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지의 정교회는 공화국 정부와 상호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투바 공화국 정부는 정교회 관련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고 있고, 정교회는 현지에서 별다른 장애 없이 선교및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런 협력이 가능한 것은 종교를 통해 현지인들에게 도덕적 기초와 정신적 지향점을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공화국 정부와 종교계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을 포괄하는 대한정교회 교구를 설립한 것은한반도의 평화 분위기 조성에 러시아 정교회가이바지하리라는 사명감도 내포
2017년에 대주교직에 올랐고, 2019년에는 대한 교구 대주교로 임명됐다. 동시에 키질 주교좌 업무도 관장하고 있다. 남·북한과 키질을 함께 관장하는 대주교로 임명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뜻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현재 한국에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대한 교구를 설립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한국에 장기 체류 중인 러시아인 숫자는 현재 5~6만 명 정도다. 그 외에도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온 10만 명 이상의 고려인 동포가 대한민국으로 영구 이주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러시아어 사용 인구는 정교회신자들을 포함해서 상당수에 달한다. 한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 방문하면서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남한과 북한을 포괄하는 대한정교회 교구를 설립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 조성에 러시아 정교회가 이바지하리라는 사명감도 내포하고 있다. 비록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지만, 러시아인 대다수는 여전히 한민족을 하나로 인식한다. 이 직책에 내가 임명된 것은 아마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유일한 한국계 주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북한 양쪽 국민에게 러시아 정교회가러시아인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며 다양한 인종을 포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거기에 더해 신도들과 성직자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한인이며, 동시에 러시아 사람이다. 2019년에 설립된 대한 교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고 발전에 필요한 과제들이 앞에 놓여 있다.

1897년 신성종무원이한국 선교부의 개설을 결정했고, 러시아를 떠난 선교사 일행은1900년에 한국에 도착
올해는 조러통상수호조약 체결 140주년이며, 한반도 북쪽 국경을 넘어 우리 동포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다. 러시아 정교회와 한국인들 사이에 형성된 초기의 교류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
약 150년 전 한인들이 러시아 극동 지방에 정착하면서 정교회 신앙을 접하게 됐다. 당시 정교회 신앙은 사실상 러시아의 국교였고, 이주한 한인 중 상당수는 러시아시민권을 취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로서는 신생영토인 극동을 자국 땅으로 만드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따라서 정교회 선교사들이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와 함께 선교 활동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곧이어 이들의 정착촌에 정교회가 들어섰다. 한인 출신 성직자들도 배출됐는데,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펼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정교회의한민족 선교 초기 역사에 관한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우리들의 조상 중에 이미 정교회 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내 한인 거주 지역 내 정교회 선교 활동 관련 자료들은 블라디보스토크교구 소속 우수리스크의 이노켄티 주교가 정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고, 한반도 내 정교회 선교 역사는 문헌조사결과를 토대로 내가 책으로 출간했다.

러·일 전쟁 후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가선교단을 이끌던 기간에 서울뿐만 아니라 일산, 문산 등 여러 지역에도한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가 설립돼
1884년 양국 간 수교 이후 한국(조선) 선교를 위해 러시아 정교회에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진출과 활동 역사에 대해 최초의 선교사 파견 시점부터 정교회사제가 해방 후 서울을 떠날 때까지 단계별로 설명해달라.
1884년 양국 간 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에 정교회 선교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은 제정 러시아 조정에서 점차 호응을 얻었다. 그때 이미 한국에서 활동 중이던 러시아 외교 사절단은 현지의 러시아 외교관들과 러시아에서세례를 받고 온 한인 신자들을 위한 사목 활동 필요성을본국 정부에 여러 번 전달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무부는 물론 니콜라이 2세 황제 앞으로 한국 선교부 개설을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1897년 신성종무원이 한반도 선교부의 개설을 결정했다. 그런데 러시아를 떠난 선교사 일행은 이런저런 이유로 1900년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에 온 대수도사제 흐리산프와 보조사제들은1900년에 러시아 외교단 공관에서 한국 최초의 정교회성찬 전례를 거행했다. 선교단 도착 전에 러시아 정부는서울 정동에 선교센터 부지 매입을 마친 상태였다. 1949년까지 러시아 선교단이 있었던 이 선교센터가 문을 열면서부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주일학교 건물이었고, 전례 서적과 필요한 문헌들의 한국어 번역 작업도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던 터라, 정교회 선교부는 얼마 가지 않아 여러 장애물에 봉착했다. 선교부를 개설한 지 불과 몇 년 후인 1904년에 러·일 전쟁이발발하자, 러시아 선교사들은 서울을 일시 떠나야 했고 2년 후인 1906년에야 복귀했다. 1906년에 새로운 선교사 그룹이 도착한 다음부터는 활동이 제법 활발했고 가시적 결실들도 있었다.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가선교단을 이끌던 기간에 서울뿐만 아니라 일산, 문산 등여러 지역에도 한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가 설립됐다. 학교에 선교회관을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하는 한편,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들도 초빙했다. 정교회 신앙의 기초교육 과정을 이수한 아이들은 세례도 받았다. 정교회 관련 도서들을 번역하고, 예배를 한국어로 진행하는 등 선교 활동이 나름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했고, 교회는 국가로부터 분리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서조달하던 선교 자금이 끊기고 선교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교사와 직원들이 해고됐고, 기존 활동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러시아 내의 정치적 변혁 외에 1910년한일합방 이후 한국에서 형성된 경직된 질서는 러시아선교사들의 활동을 더욱 옥죄었다.
힘든 가운데서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은 1949년까지이어졌다. 선교부의 마지막 책임자로 남아 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소련 국적 취득을 결정하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정교회 사제의 이 결정은 부정적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공산혁명을 피해 한국으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들이 반감을 표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사제는 중상과 모략을 당한 끝에 투옥되는 운명에 놓였다. 대수도사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심지어 고문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선교회 운영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양도한다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압박받은그가 모든 걸 거부하자, 한국의 관계 당국은 사제의 강제출국을 결정했다. 1949년 여름 그는 어머니와 함께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38선 국경으로 실려 가 북한 땅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은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선교 활동은 당연히 중단됐고, 선교회 소속 토지와 건물등 모든 재산은 국유화됐다. 나중에 한국에 유엔군이 진주하면서 그 일원으로 서울에 온 그리스 군종 사제가 러시아 정교회 선교부와 한국인 정교 신자들, 정교회 사원의 존재 등에 대해 알게 됐고, 이 정교회 공동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소속됐다. 7년여에 걸친 재판 절차 끝에 러시아 정교회 부지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소유로 이전됐는데, 재판 과정에서 발생한 거액의 소송비를 물어야 해서 이 땅을 매각했고 남은 자금으로 현재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는 새 부지를 매입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의 마지막 신부가 한국에서 추방된 지 70년이 되는 2019년에 러시아 정교회 대한 교구가 설립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부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그런 와중에도 선교활동이 남긴 인상적인 발자취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건 현지인, 즉 한국인들 사이에 정교회 공동체가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세례를 받은 한국인 가족들이 정교회 성당에 계속 다녔던 덕분에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산하의 공동체가 등장할 수 있었다. 2000년에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만난 80~90대 나이의 노인분들(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중에는 오래전 러시아 선교사들과 교류했던 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어 예배와 성가, 단어들을 일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 모든 흔적은 지난 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정교회 선교사들이 어려움 속에서 수행한 사목 활동의 결과이다. 러시아 선교 사제가 서울을 떠난 다음에도 정교회가 한국에 항상 존재했는데, 바로 이 점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정교회 신앙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한국인 신자들덕분에 20세기 내내 한국 정교회의 역사는 단절 없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람들 모두가 정교회를아는 건 아니지만 정교회 신앙에 대해서는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것이 오래전 서울에 왔던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남긴 결실이다.
2006년 평양에 성 삼위일체 교회가 세워졌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다. 평양에 정교회 사원을 설립한 의미는 무엇인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러시아 공식 방문 중 하바롭스크에서 정교회 사원을 찾았고 평양에 비슷한 교회를 지었으면 하는 뜻을 밝혔다. 그 결과 2~3년 만에 러시아식 돔을 가진 교회 건물에 성상화가 배치된 성 삼위일체사원이 등장했다. 이 교회는 러시아와 북한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기억되고 있다. 현재 교회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정교회 신자들, 즉 러시아 대사관 직원과 북한을 방문하는 러시아 손님들을 위한 전례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이 교회의 관할 책임을 맡고 있어서 평양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지난 7월에 다녀왔다.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북한 사람들이키릴 총대주교로부터 사제 안수를 받고 봉사 중인데, 현지 러시아인 신도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2006년 평양에 세워진성 삼위일체 사원은 러시아와 북한의우호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
한국 내 러시아 정교회의 현재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서울을 비롯한 어느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가? 신도들의 구성은 어떻게 되며, 또 신자 수는 어느 정도인가?
앞서 말했듯 현재 약 5~6만 명 정도의 러시아인이 한국에 살고 있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 수가 상당하다. 이들의 영적인 삶을 어떻게든 돕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입장이다. 처음에는 서울과 부산 두 곳에 교회를 결성했다. 2019년에 교구를 개설하자마자 바로 그다음 해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해서 여러 면에서 제약이 많았다. 얼마 전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지난여름에는 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지역에 정교도 신자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정교회 본당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 지난여름 경주에 정교회 모임이 형성됐고, 현재는 수도권 남부와 충청권 신자들이 모이기 편리한 청주에 본당 개설을 준비 중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안산과 인천에서도 비슷한 요청이오고 있다. 교우 대다수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이미 본당을 개설한 서울과 부산에는 한국인 신자도 제법 많다.
정교회의 선교 역사는 초창기부터 현지 언어와 문화적 특성을수용하는 전통이 있다. 한국과 투바의 선교 활동에서 역점을두고 추진하는 일은 무엇인가?
두 곳 모두에서 현지어로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맨 처음부터 전례서와 관련 문헌의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아직은 사제가 둘 뿐이어서 많은 작업이 이뤄진 건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를 졸업한 한국 국적의 수도사제 파벨 최와 현재 부산에서 봉사 중인 러시아인 사제가 함께 일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함께 모여서 여러 텍스트의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정교회 신앙과 역사 관련 도서들을 출간했고, 전례서 번역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고 있다. 얼마 전에는한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전례서도 간행했다. 현재서울과 부산에서는 한국인 신자들이 온전히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례를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번갈아 진행하고 있다.
투바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문헌을 현지어로 번역했고, 예배도 투바어로 올린다. 동시에 투바 사람들의 고유 전통을 정교회에서 수용하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이고있다. 한국에서 그렇듯 투바에서도 민족 전통 축일 또는 조상의 추모 예배 등을 성전에서 진행하고 있다. 현지인들이 고유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면서 정교회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 거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에서 구교도 같은 분리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현재 정교회는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고난을 겪기 전에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의견의 일치를 찾으려 애써야 한다. 구교도 분열의 역사는 수 세기에 이르지만, 현대 러시아 정교회는 구교도 신자들과의 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구교도 신앙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얼마 전에거둬들였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갖고 한 나라에 살고 있으며, 서로의 차이점이 교리가 아닌 전례 의식에 있음을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 결과로, 구교도 의식에 따라 정교회 사원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사례도 생겼다. 투바에 가면 구교도 전례 의식을 배운 정교회 사제가 구교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전례를 집전하는 교회도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30여 명의 구교도가 현지 정교회 전례에참석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을 고수해 온 구교도 신자들이현재의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있을것이다. 한 예로, 투바 공화국의 일부 구교도는 일반인의접근이 힘든 타이가 외딴 지역에서 외부와의 어떤 접촉도 마다하고 완전히 폐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신앙이란 개개인의 선택이어서, 정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수 세기에 걸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정성과 노력을 지속해서 쏟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 모두가현재 우리는 세속주의와 신앙의 근본으로부터의 이탈 같은 도전에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
한국의 가톨릭 사제 중에 러시아 성상화 관련 공부를 하고 직접 성상화를 제작하는 분도 있다. 가톨릭을 포함한 한국의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어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에서 러시아 성상화를 공부한 장긍선 에로니모 신부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교류하고 있다. 이분의 성상화 제작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수준이 아주 높고 훌륭한 작품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성상화 제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3년 과정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고 수강생들의 작품을 담은 앨범도 매년 보내온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러시아 정교회 문화와 전통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참으로 기쁘다.
현재는 우리 정교회의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다 보니여타 종교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미흡한 편이다. 그래도원불교 교단이 활발하게 운영 중인 모스크바의 문화 센터에 가 보았고, 한국에 와서 원불교 관계자들과도 만났다. 한국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 모두가 현재 똑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세속주의의 도전, 신앙의 근본으로부터의 이탈 같은 정말 심각한 문제들에대해 그들과 같은 입장인 만큼 공통의 언어로 대화할 부분이 많을 것 같다.
현재 한국 러시아 정교회에서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과제는 무엇인가?
으뜸 목표는 대한민국에 사는 러시아어권 정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이들에게교회 활동과 예배 참여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 공간을 마련하고 성직자를 초빙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다음 과제는 한국인들에게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소개하고 선교하는 일이다. 꼭 러시아 정교회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 정교회 신앙 자체를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목표는 한국인들에게 러시아 정교회의 문화와 전통을 소개하는 일이다. 어차피러시아와 한국은 이웃 나라다. 갈등을 피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잘 알아야 한다. 한국은 훌륭한 문화를 보유한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다. 중국 문화, 러시아 문화, 일본 문화 등이 그것이다.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 어떤 존재인지 서로 알아야 한다. 러시아인 정신세계의 중심에는 정교회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인을 이해하려면 오랜 세월을 두고 이들의 정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친 정교회 신앙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뿌리에는정교회 신앙이 있다. 정교회 문화에 관한 깊은 이해 없이교회 건축, 미술, 음악 등에 다가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자면 이 모든 활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할 교회 공간의 확보가 중요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한 계획이 있는가?
현재 사용 중인 임대 공간 대신 자체의 독립 교회를 갖고 싶은 열망이 있고, 또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러시아와 한국 양쪽에서 우리 계획의 실현에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도 찾고 있다. 서로 힘을 합치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한국 내 정교회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설계 중인 우리 러시아 정교회 대한 교구의 구체적인 계획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고 있다. 국제정치 상황으로 인해 러·한 양국 관계가크게 영향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정교회의 존재가러시아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도일조했으면 한다.
최근 국제관계는 긴장과 대결로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런 중에 여러 나라 정교회 사이의 관계 또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그리스, 우크라이나 정교회 등에대한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다. 서로 형제자매이며 공동의 집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공동의 집은 한국 땅이며,당연히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치가 이런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크게 잘못된 일이다.러시아와 한국은 상호 관계를 악화시킬 이유가 없다고믿는다. 러시아는 북한이든 남한이든 항상 한국사람들에게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한국 문화에보이는 러시아인들의 관심과 사랑 또한 크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러시아 문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문화와 개인적 관계 같은 영역이 정치에 휘둘리면 안 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교회들 사이의 관계혹은 국가 간의 관계에는 늘 부침이 있었다. 우호적인 시기가 있었고 불화 관계였던 때도 있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차이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과 이해심을 우리가 충분히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정치가 지금 우리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출발점은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누구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다.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에 가장친숙한 존재다. 러시아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인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에게 엄청난 비극이다. 이 갈등은 외부 세력이 부추겨서 발생한 일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 국민이 싸우고자 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을 만든 정치인들의 잘못이다. 정교회 신앙에 관해 말하자면, 천 년 동안 러시아에는 하나의 교회가있었다. 우크라이나 교회, 벨라루스 교회, 러시아 교회가 별도로 존재했던 게 아니다. 교회를 민족의 경계에 따라분리하는 민족중심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묘한 질문이다. 일부에서는 정교회가 지나치게 크렘린을 비호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정치와 종교의관계는 어때야 한다고 보나?
일종의 선전 공세다. 제대로 비판하려면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러시아 역사 전체에서 박해가 가장 심했던 소련 시대에서 우리가 벗어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소련 시절 수천 명의 성직자가 고문을 당하고 살해됐으며, 러시아 전역에서 무수한교회가 파괴되고 폭파됐다. 정교회가 크렘린과 가까웠기때문에 일어난 일일까?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지금 우리는 정교회와 러시아 국가의 역사에서 다른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는 러시아 국민의 행복과 효율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의 입장이 일치한 상태가 잘못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의 삶을돌보는 일은 교회와 국가 둘 모두에 부여된 과제다. 교회가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국가는 삶의 외적인 문제를담당하는 역할의 차이가 있는 건 물론 당연하다.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는 지금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 사이의 협력 관계는 아주 좋은 특별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좋은 목적에서 국가가 교회를 지원하고, 사원을 세워주며, 또 정교회 문화를 진흥시킨다면 교회가 국가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본다. 물론 국가와 교회는 각각 독립적인 기관으로, 각자의 활동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는 것이문제가 될 수는 없다.
사회가 세속화되고 기독교 내부에서 자유주의적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기독교 전통의 수호자로서의정교회 위상은 높아질 것
우리 시대에 타 종교와의 비교에서 정교회 신앙이 갖는 차별성은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인 대상의 선교 전망은 어떻다고 보는가?
특정 교회나 사원으로 향할 때 우리는 자신이 왜 거기로 가야 하는지를 묻고 생각하게 된다. 정교회가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 정신은 변함없이 확고하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훼손 없이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믿음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항상 복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충실해 왔다. 최근들어 복음의 기본에서 벗어나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을이해하려는 경향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더욱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례들도 빈번하다.하지만 정교회는 2천 년 동안 교리를 그대로 유지해 왔다. 일부 기독교 종파 지도자들이 정교회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동성 간 결혼을 아무렇지 않은 듯 축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여성을 성직에 임명하려는 시도 또한 같은 이유에서 용납될 수 없다. 요컨대 정교회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세속화되고 기독교 내부에서 자유주의적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기독교 전통의 수호자로서의 정교회 위상은 높아질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부 부정적 변화에 불만을 느낀 신자들이 정교회의 문을 두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례로, 미국에서비교적 짧은 기간에 정교회 신자가 백만 명 이상 늘어난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을 대폭 수용하고 나선 몇몇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무엇이 참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자유주의적 사상에 감염된 설교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 시대에,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간직해 온 정교회신앙에 분명 어떤 사명과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교회 신앙에 관심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한국어도서들은 무엇인가?
한국어로 된 정교회 관련 책을 두루 알고 있지는 않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 한국 대교구에서 출간한 다양한 도서가 있다고 들었다. 러시아 정교회도 독자적인 출판사를 등록하고 정교회 관련 도서 출판을 얼마 전부터시작했다. 출간 도서 중에는 200년 전에 집필된 성 필라레트의 『정교회 교리문답』을 파벨 최 신부가 한국어로번역한 책도 있다. 오래된 도서지만 정교회 신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한국에서의러시아 정교회 선교 역사를 다룬 나의 연구 결과도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다. 현재는 일라리온 알페예프총주교의 교리문답 도서를 번역 중인데 조만간 나올 예정이다.
정교회 사제로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중 누구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정교회 입장에서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정교회 신자로서 당연히 도스토옙스키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정교회 신앙을 가진 작가이자 철학자다. 톨스토이는 알다시피 정교회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가르침을 정리했다. 언젠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다가 알료샤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나 자신의내면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책 장을 넘기면서 도스토옙스키가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깊이 알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작가가 창조한 알료샤 카라마조프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그렇게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던 건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천재적 재능의 작가가 진정한철학자이자 예언자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고, 기독교 사상의 전달자로서 작가의 이름은 앞으로 수 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으로 믿는다. 어째서일까? 고대의 기독교 성인 테르툴린은 자신의 저술에서‘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본질상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고, 또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건 당연한 이치다. 도스토옙스키는 하느님을 알기를 원하고 또 그래서 그 길을찾아 나선 우리를 인도해 주는 작가다. 정교회 서울 본당에서 세례 후 신자 생활을 하는 한국인 한 명도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교회를 찾아온 경우다. 도스토옙스키는 정교회 신앙의 선교사이며 설교자다. 바로 이 점이 도스토옙스키의 독창적이고 위대한 공헌이며, 톨스토이의 높은인기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와 같은 한·러 관계의 냉각 상태에서 정교회가 양 국민 간상호 이해와 문화 교류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한국 러시아 정교회의 당면 과제 중 하나는 양국 국민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일이다. 서로 잘 알아야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러시아인은 정교회 정신의 소유자라는 걸 확신하기에, 한국인들이 러시아 문화를 알고자 하면 정교회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러시아에서 중요한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면 항상 건축, 미술, 음악 등 정교회 전통과 문화를 만나게 된다. 이걸 우회하고 러시아를 알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모든 한국인이 러시아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니,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가 열심히 활동하면 더 많은 사람이 러시아와 정교회를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있다면 이는 한국 정교회의 소중한 공로가 될 것이다.

대한정교회 공식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