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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총대주교. 그 직함의 역사

문은 대외교회관계부 포털에 게재된 교회사와 역사 연대학 전문가이자 사학 준박사,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사학부 및 스레텐스키 신학원 부교수, 모스크바 신학원 강사 파벨 쿠젠코프의 글.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듯 딥티호스상 첫번째 지역 정교회의 수좌주교의 완전한 직함은 ‘신(新) 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겸 세계 총대주교’(Archbishop of Constantinople, New Rome and Ecumenical Patriarch)이다. 여기서 ‘세계’(Ecumenical)라는 말은 동로마 특유의 화려한 존칭, 즉 고대 전통에 대한 존중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교의 교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세계적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형제적 일치 안에 있으면서도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했던 것처럼, 그들이 세운 지역 교회들 역시 하나인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지체들로서, 성령 안에서 결합된 자매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법의 미묘한 문제들에 익숙하지 않고 교회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칭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세계’라는 단어의 기본적 의미에 기대어 이해하는 그들의 인식 속에서, 이 직함은 마치 여러 총대주교들 중 제일인자에게 전 세계 정교회의 지도자라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그의 신자 수가 약 600만 명에 불과하여[1], 전체 정교회 신자의 약 2%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2]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과연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그 본래의 취지는 무엇인가?

세계로서의 제국

무엇보다 먼저 ‘세계’라는 말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그리스어로 οἰκουμένη이며, 동사 οἰκέω(살다, 거주하다, 거주시키다)에서 파생된 수동 분사로, 통상 생략되는 명사 ‘땅’을 전제로 할 때 그 문자적 의미는 곧 ‘인간이 거주하며 삶의 터전을 이룬 지상의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이렇게 불렀는데, 이는 멀리 떨어진 지역들, 곧 사람이 살지 않거나 야만적인 이민족들이 거주한다고 여겨졌던 곳들과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세계’란 보통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계 전부를 뜻한 것이 아니라, 문명이 존재하던 영역, 즉 세계의 일부만을 가리켰다. 광대한 제국의 통치자들은 흔히 ‘세계의 왕’이라 불렸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그 한 사례이다(1에즈라 2:2). 그리고 그리스 · 로마 문명이 로마 황제들의 권세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을 때, ‘세계’라는 명칭은 곧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성 루카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서술하면서 이 단어를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πᾶσαν τὴν οἰκουμένην; 루카 2:1) 즉 ‘이쿠메니’라는 용어는 단순히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고대 문명이 형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직된 영역을 의미하였다. 다른 문명들 역시 각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해는 여러 세기를 거쳐 지속되었다. 예컨대 1262년 불가리아의 통치자 야코프 스뱌토슬라프가 전(全) 루시의 관구장주교 키릴로스 2세에게 《교회법전》(Кормчая книга)의 사본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당신의 말씀으로 루시의 세계가 밝아지기를(Да ся словом твоим вселенная Руская просвѣтитъ)”.

사도대등자 성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325년, 제국 전역의 여러 끝자락에서 주교들을 니케아로 소집하여 전 교회의 문제들을 논의하게 하였을 때, 이 모임은 ‘세계공의회(Ecumenical Council)’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황제의 소집에 따라 특별히 중대한 사안이 발생할 경우, 광대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주교들이 모여 회합하는 전(全) 제국적 차원의 제도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회의는 가장 권위 있는 주교들의 주재 아래 이루어졌으며, 이 주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부들의 지도자’라 불리게 되었고, 나아가 총대주교(Patriarch)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세계적’이라는 표현이 ‘전 제국적, 국가 전체적’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유스티니아노스 대제(527~565)의 입법에서였다. 그의 법률들에서는 제국 전 영토를 가리키는 의미로 ‘세계’, ‘세계적’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541년에 공포된 제109 노벨라(Novella; 신법전 – 역자)에서 황제는 세계공의회와 총대주교청이라는 교회의 최고 기구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포괄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제시한다. “이단자들이란 교부들이 그렇게 불렀고 우리 또한 그렇게 부르는 이들로서, 여러 이단에 속한 자들 … 그리고 일반적으로 거룩한 하느님의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지체가 아닌 모든 자들을 말한다. 이 교회 안에서 온 세계의 모든 지극히 거룩한 총대주교들, 곧 서방 로마의 총대주교와 이 황도의 총대주교,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와 테오폴리스(안티오키아 – 필자 P. 쿠젠코프 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지극히 존귀한 주교들은 일치하여 사도적 신앙과 전통을 선포한다.”[3]

그러므로 제국 법제의 관점에서 볼 때, 정교 신앙은 ‘세계의 다섯 총대주교들’과 그들에게 소속된 주교들에 의해 일치하여 선포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일치를 증언하기 위하여 황제들에 의해 세계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총대주교들에 대한 공경의 서열은 교회법들(제2차 세계공의회 규범 제3조; 제4차 세계공의회 규범 제28조; 트룰로 공의회 규범 제36조)에 의해 규정되었고, 또한 로마 제국의 법률들(《유스티니아노스 법전》(Codex Iustiniani) I.1.7, I.2.16; 《유스티니아노스의 노벨라》(Novella Iustiniani) 제131호 등)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 서열은 곧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다.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점은, 이 다섯 총대주교좌의 목록이 결코 독립 지역교회들의 수를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범주 밖에는, 그 시대에 제국의 경계 밖에 있던 정교회들(조지아 교회, 아퀼리아 교회)뿐만 아니라, 제국의 경계 안에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지닌 교회들(키프로스 교회, 카르타고 교회, 유스티니아나 프리마 교회) 또한 포함되지 않는다. 유스티니아노스에 따르면, 펜타르히아는 정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제도로서, 그 일치의 보증자는 제국 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주교좌들의 수좌주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다섯 총대주교 모두가 ‘세계 총대주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섯 사람의세계 총대주교들에서 단 한 사람의세계 총대주교

이른 사례는 이른바 449년 에페소스의 ‘강도 공의회’ 문서들에서 발견된다. 이 공의회의 기록에서, 에바즈의 올림피오스 주교는 그 악명 높은 거짓 공의회의 주도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를 가리켜 “우리의 가장 거룩한 아버지이시며,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세계 대주교”라고 호칭하였다.[4]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라는 공식 직함이 신 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에게 제도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530년 이후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의 법률들에서였다.[6] 이러한 변화는 동로마 제국 밖에서는 곧바로 인식되지 않았으나, 일단 인식되자마자 로마 주교좌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성 그리고리오스 1세 교황은 ‘세계의’라는 표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내 지배권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읽어내고, 이에 대한 깊은 우려를 알렉산드리아의 에블로기오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토로하였다.[7] 이에 대해 에블로기오스는 물론,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역시 교황에게, 이 명칭은 단지 의전적·수사적 성격을 지닌 거창한 직함에 불과할 뿐이며,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지도자는 당연히 사도좌의 수좌주교인 교황 자신이라고 해명하였다…
한편, 모든 총대주교좌가 세계 총대주교좌라는 인식은 동로마 세계 내에서 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예컨대 제7차 세계공의회에서 예루살렘의 요안니스 총대주교의 대리인은 가장 거룩한 총대주교들을 “세계의 목자들”이라고 지칭하였다.[8] 또한 성 테오판 고백자(818년 안식)는 그의 저명한 저작 『연대기』 서문에서, 자신이 “위대한 세계 주교좌들, 곧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주교들의 연도들을 기록할 것인데, 이는 정교인으로서 교회를 사목한 이들뿐 아니라, 이단자로서 강도처럼 교회를 지배한 이들까지도 포함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9]

주목할 만한 점은, 9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황 사절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가 ‘세계의’라는 직함의 의미를 직접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곧, 세계(oecumenicus, universalis) 총대주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마치 전 세계 위에 군림하는 주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한 부분에 대해 지도적 권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

이후 동로마의 교회법학자들인 테오도로스 발사몬(11세기)과 마테오스 블라스타리스(14세기)는, 다섯 총대주교들 사이에 “세계의 네 기후대의 지역들”이 분배되어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어느 총대주교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 교회들, 곧 불가리아 교회, 키프로스 교회, 조지아 교회가 존재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총대주교에게도 “다른 총대주교의 관할에 속한 나라에 스타브로피기아(직할 행정구 또는 수도원 – 역자)를 설치하거나, 그 나라에서 성직자를 데려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이는 교회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명시하였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법률과 동로마 노모카논(Νομοκανών; 교회법전 – 역자) 안에서는 점차 콘스탄티노플에만 고유하게 부여된 특권들에 관한 관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컨대 880년 판 『제14 노모카논』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제1권 제1장 제5절) “총대주교들의 서열에 관하여 … 그리고 모든 교회의 머리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법전』 제1권 제1편 제7절, 제2편 제6·20·24절, 그리고 『노벨라』 제1편 제2절 및 제2편 제3절을 보라. 또한 『법전』 제1권 제2편 제16절은 콘스탄티노플이 모든 것 위에 주재권을 가진다고 말한다”[12]. 이와 같은 사상을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이사고기』(Εἰσαγωγὴ; 886년) 역시 되풀이한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는 제국에 의하여 영화를 누린 주교좌로서,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제1위의 서열을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교회법은 다른 주교좌들에서 발생하는 분쟁들 또한 그 검토와 판결을 위해 이곳으로 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3]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노모카논에 인용된 그 어떤 본문도 명시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모든 교회의 머리’라고 칭하지 않으며, 또한 어느 법률도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 전세계적 관할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제국 자체의 영토 내부에서를 말하자면, 노모카논과 『이사고가』의 이러한 진술들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9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이 동방과 서방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여, 그 국경이 사실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교회법적 관할권 영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법전의 적용 범위는 그 성격상 제국의 영토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규정된 콘스탄티노플의 특권들 역시 동일한 영토 내에서만 유효하다. 이러한 상황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과도 정확히 부합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관례대로 곧 동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밀레트 바시에서세계 정교회의 지도자

1453년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정교회의 모든 총대주교청들은 다시 하나의 국가 안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법적 토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샤리아(Sharia; 이슬람교 율법 – 역자)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치적인 민족 · 종교 공동체, 곧 밀레트(Millet)로 구분되었고, 각 밀레트의 수장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였다. 이러한 ‘밀레트 바시’(Millet bashi) 가운데 하나가 바로, 튀르크인들에 의해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파나리 지구로 옮겨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다. 튀르키예 법률에 따라 그는 바브 으 알리(Bâb-ı Âli; 오스만 제국의 최고 국정운영 기관 – 역자)의 통치 하에 거주하는 모든 정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법적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이 새로운 지위를 이용하여 파나리의 총대주교들은 타 지역교회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나, 각 지역교회의 수좌주교들이 견지한 확고한 교회법적 입장에 부딪혔다. 이 입장을 가장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한 이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멜레티오스 피가스였는데, 그는 1592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어느 총대주교좌도 다른 총대주교좌에 종속되지 않는다.”[14]

이 서한은 예레미아스 2세가, 당시 교황권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며 동맹자를 찾고 있던 개신교도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을 세계 정교회의 지도자로 내세우려 한 시도와 관련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그는 1576년 튀빙겐의 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세계교회는 교회들의 조국이며, 교회 운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세계교회는 정교회 안에서 장자권을 받았으며, 그 머리로 세워졌다.”[15]

파나리인들은 무슬림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정교 교회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에 실질적인 내용을 부여하려 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을 전 세계 정교회의 지도자로 제시하려 하였다. 1872년 11월, 콘스탄티노플 주재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백작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을 둘러싼 상황을 논평하면서 외무성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다른 모든 교회들 위에 높이려는 경향, 서방 세계에서 교황좌와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려는 시도, 그리고 다른 교회들의 재산을 자기 소유처럼 여기려는 태도가 파나리의 그리스인 집단 안에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 집단은 정교 세계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세계 총대주교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파나리의 평신도 인사들을 위해 그 부를 취하기를 바라고 있다.”[16]

이와 동시에 주목할 만한 점은, 교황의 로마가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하려는 시도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이 언제나 단호하고 명백하게 규탄해 왔다는 사실이다. 1895년의 총대주교 및 시노드 서한은 이를 분명히 밝힌다. “동방과 서방의 각 독립교회들은 일곱 차례의 세계공의회 당시 완전히 독립되고 자율적이었다. 동방 독립교회들의 주교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에스파냐,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의 주교들 역시 자신들의 교회를 자체적인 지역공의회를 통해 관리하였다. 로마의 주교는, 그 자신 또한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했던 만큼, 개입할 어떠한 권한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온 교회의 결정을 요하는 중대한 사안이 발생할 경우에는 세계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이 공의회만이 언제나 교회 안에서 최고 권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이 고대 교회의 제도이다.”[17]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그리스 세계 안에서, 승전한 연합국들의 원조를 받아 ‘대 이데아(Μεγάλη Ἰδέα)’, 곧 동로마 제국의 부활이 곧 실현될 것이라는 환상을 낳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파나리 내부에서는 세계 총대주교청을 전세계적인 초교파 기독교 중심지로 전환시키려는 구상이 탄생하였다. 1918년 가을 이후 공석이던 총대주교좌의 대행을 수반으로 한 콘스탄티노플 시노드는 1920년 2월 11일(구력 1월 29일) “모든 곳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국제연맹을 본뜬 일종의 범기독교적 교회 연맹을 창설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연맹은 그리스어로 키노니아(Κοινωνία)라 불렸는데, 이 말은 단순한 ‘연합’이나 ‘결사’뿐 아니라 ‘교회적, 성찬적 통교’를 뜻하기도 하여 특별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복된 일치를 준비하고 보다 쉽게 실현하기 위함”이었다.[18] 이 야심찬 계획은 많은 정교회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고, 에큐메니컬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스웨덴 루터회 대주교 나탄 쇠데르블롬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니케아 공의회 기념년도인 1925년에 범기독교적 ‘세계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협상국 군대가 철수하고,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재건된 튀르키예의 영토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추방되는 결과로 끝났다.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케말주의자들은 ‘그리스’ 총대주교청 역시 추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바로 이때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은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수반으로 한 그리스 대표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계 총대주교청은 모든 정교회 가운데 수위(primate)의 지위를 가진다… 신앙, 기독교 윤리, 교회법의 문제에 있어 세계 총대주교청의 견해와 권위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19] 프랑스와 영국의 압력 아래에서 튀르키예 측은 양보하였고, 총대주교와 파나리인들은 정치 활동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조건 하에 이스탄불에 잔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세계공의회’에 관한 구상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튀르키예 내에서 세계 총대주교의 지위는 결코 강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파나리 지구의 그리스계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1570년 전 할키돈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 귀속시켰던 그 법적 관할 영역 안에는 오늘날 세계 총대주교의 신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현재 그의 주된 교세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 일대에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은 일종의 정당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 측 교회법학자들의 저술에서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후에는 점점 노골적으로, ‘세계의’라는 직함을 지닌 주교에게는 마땅히 ‘세계의’ 관할권도 부여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어떤 사건이든 선택적으로 끌어오고, 고대의 선례들은 문맥에서 잘려 나가며, 이미 충분히 해명된 교회법 조항들마저 왜곡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바로 이 유서 깊은 직함이었다.

2008년 유럽의회 총회에서 연설하며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수하게 종교기관으로서 우리 세계 총대주교청은 참으로 보편적인 사도적 봉사를 수행하고 있으며, 인류 가족의 의식을 고양하고 확장하고자 합니다. 곧 우리 모두가 하나의 가정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것이 바로 ‘세계’라는 말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오이쿠메니’란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가 함께 살아가는 가정으로서의 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의 직함에 포함된 ‘ecumenical(세계의)’이라는 어휘는 영어권 청중에게 있어서 개신교의 범기독교 일치 운동과 연관된 특수한 함의를 지닌다. 러시아 교회의 용어로는 ‘세계의’(Вселенский)와 ‘에큐메니컬’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처럼 들리는 반면, 영어와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이 두 표현이 동일한 어휘로 쓰인다. 그 결과, 이른바 ‘새로운 교회론’을 옹호하는 이들의 글에서는 이러한 의미들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유스티니아노스 대제 시대에, 제국 내 다섯 사람의 세계 총대주교들이 정교회의 기둥이자 보증자로서 수행한 특별한 역할을 가리키던 이 고대 용어는, 어느새 ‘에큐메니컬 총대주교’라는 개념으로 변모하여, ‘정교회 세계의 지도자’[20]라는 지위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전 기독교를 아우르는 ‘초교파적’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요구까지 결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가 제1차 세계공의회 기념년도인 2025년에 교회 지도자들의 회합을 제안하며, 그 자리에서 “보다 단호한 에큐메니컬 노선(more determined ecumenical course)”을 수립하자고 제안한 사실[21]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1]. В русской и английской версиях «Википедии» — около 5,3 млн, в греческой — около 6,6 млн.

[2]. 300 млн, согласно русской «Википедии» (со ссылкой на: Juergensmeyer M., Roof W. C. (ed.). Encyclopedia of Global Religion. Los Angeles: SAGE Publications, 2012. Vol. 1. P. 319); греческая версия называет численность от 200 до 260 млн, английская — 220 млн.

[3]. Corpus Iuris Civilis. T. III: Novellae. Berlin, 1963 (8 ed.). P. 518.

[4].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T. II.3.1. Berlin; Leipzig, 1935. P. 187; Деяния Вселенских Соборов. Т. 3. Казань, 1908. С. 168.

[5].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T. II.1.2. Berlin; Leipzig, 1933. P. 141; T. II.3.2. 1936. P. 415-416; Деяния Вселенских Соборов. Т. 4. Казань, 1908. С. 56.

[6]. См.: Codex Iustiniani, I.2.24; I.1.7.

[7]. Epistula 9, cap. 12.

[8].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Series 2. T. III.1. Berlin; New York, 2008. P.188-189; Деяния Вселенских Соборов. Т. 7. Казань, 1909. С. 80.

[9]. Theophanis Chronographia / Ed. C. De Boor. Leipzig, 1883. Vol. 1. P. 3.

[10].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Series 2. T. III.1. Berlin; New York, 2008. P.1-2; Деяния Вселенских Соборов. Т. 7. Казань, 1909. С. 26.

[11]. Σύνταγμα τῶν θείων καὶ ἱερῶν κανόνων. Ἀθῆναι, 1992. Τ. 6. Σ. 257-258.

[12]. Juris Ecclesiastici Graecorum historia et monumenta / Ed. I. B. Pitra. Romae, 1868. T. II. P. 462-463; Нарбеков В. Номоканон Фотия с толкованиями Вальсамона. Казань, 1899. Ч. 2. С. 56-58.

[13]. Collectio librorum juris Greco-Romani ineditorum / Ed. C. E. Zachariae von Lingenthal. Lipsiae, 1852. P. 66-68.

[14]. Μεθόδιος (Φούγιας), μητρ. Ἐπιστολαί Μελετίου Πηγᾶ, Πάπα καὶ Πατριάρχου Ἀλεξανδρείας (1590-1601). Αθῆναι, 1976. Σ. 19, 21.

[15]. Καρμίρης Ι. Τὰ δογματικὰ καὶ συμβολικὰ μνημεῖα τῆς Ὀρθοδόξου Καθολικῆς Ἐκκλησίας. Τ. 1. Ἀθῆναι, 1960. Σ. 476.

[16]. Каптерев Н.Ф. Сношения Иерусалимских патриархов с русским правительством. СПб., 1898. Ч. 2. С. 804.

[17]. Окружное Патриаршее и Синодальное послание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ой Церкви по поводу энциклики Льва XIII о соединении Церквей от 20 июня 1894 года.

[18]. Καρμίρης Ι. Τὰ δογματικὰ καὶ συμβολικὰ μνημεῖα… Τ. Βʹ. Ἀθῆναι, 1953. Σ. 957-960.

[19]. Lausanne Conference on Near Eastern Affairs (1922-1923). Records of Proceedings and Draft Terms of Peace. London, 1923. P. 324, 335.

[20]. Именно так, «leader of the Orthodox world», назвал Варфоломея в своем Твиттере Госсекретарь США Майкл Помпео в ноябре 2020 г.

[21]. Church Times, 19 Febr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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