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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세계공의회와 교회 내에서의 우선권 주장

451년 할키돈에서 열린 제4차 세계공의회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이다. 여러 세계공의회들 가운데서도 할키돈 공의회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공의회를 통해 오랜 세월 지속된 그리스도론 논쟁이 마침내 종결되었으며, 하느님이자 사람(God-Man)이신 구세주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결합에 대한 교의가 결정적으로 판명되었다.

공의회는 이 문제에 관해 성경과 성 교부들의 저술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의 가르침, 그리고 플라비아노스 대주교에게 교황 레온 1세가 보낸 서신이,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두 본성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정확하고 엄격하게 정교적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 정교 교부들의 신앙 진술은 공의회에 의해 그리스도론의 정교적 모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공의회 신조에 반영되었다.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 모두는 한 목소리로 한 분이요 동일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 고백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셨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며 인성에 있어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본질이 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세기 이전에 성부께로부터 나셨고, 인성에 있어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우리는) 그분이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자로서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며 나누이지 않고 분할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니셨음을 인정한다. 그분은 결합으로 인하여 두 본성 간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오히려 각 본성의 속성이 보존되고, 함께 유일한 위격과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분은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할되지 않으며, 한 분이며 동일하신 독생자, 성자, 하느님, 말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그분에 대해 가르치신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고 교부들의 신조가 우리에게 전해 준 바이다.” 이러한 신앙의 정의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 이단을 근본적으로 규탄하고 무너뜨렸다. 이 정의는 너무도 심오하고 완벽해서 이후 어떠한 이단의 시도도 성공할 수 없었다.

이후의 공의회들도 교의적·법규적 규정에서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이 할키돈 공의회의 결정에 의지하고, 그것을 흔들리지 않는 토대로 삼았다.

이 공의회가 당대 교회 생활에 미친 주목할 만한 영향 중 하나는, 교의적·도덕적·금욕적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의 문학이 놀라울 정도로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시기는 정당하게도 기독교 문학의 ‘황금기’라 불릴 만하다. 이 문학적 부흥에는 당대의 탁월한 기독교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는 교회의 교리들을 둘러싸고 기독교 사상이 비상한 열정을 보이던 시대였으며, 당시 대표적 신학 전통이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여러 관점들이 서로 교차하고 마침내 조화를 이루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단성론파 이단

할키돈 공의회가 열릴 무렵, 거룩한 교회는 이미 교의적·윤리적·주석학적 문제들에 관한 깊고 방대한 저술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유산의 빛 아래,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제4차 세계공의회의 교부들은 단성론파 이단을 규명하여 단죄하였고,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규정을 선포하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공의회는 교회의 신학적 문학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였으며,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복음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사실상 공인하고 찬미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온 교회를 위한 단일한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앙의 신조를 확정함으로써 신자들을 더욱 긴밀한 교회적 친교로 불러 모으기도 하였다. 바로 여기에 할키돈 공의회의 위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우선권에 대한 로마 주교좌의 야심

제4차 세계공의회가 지니는 두 번째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교회 행정에서 순수하게 합법적인 공번성의 근거들을 권위 있고 실질적으로 확립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 있다. 이점에 있어서 공의회는 한편으로 이러한 공번성의 근거들을 반(反) 교회적으로 해석하는 이론이 외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개인이 이 근거들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경우와 맞서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두 갈래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단성론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 총대주교로부터 온 것으로, 그는 거칠고 집요하며,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주교들과 비교해도 두드러진 성향을 보였다. 둘째는 정교인이었던 로마의 대 레온 1세 교황으로부터 온 것으로, 그는 로마 주교가 전 세계 교회에서 가진다는 수위권에 관한 이론을 분명히 지지하였다.

이와 같이 할키돈 공의회는 단지 이단과 싸우는 데만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최고 행정권에 대한 사적 침해에 맞서 싸우는 데에도 동일한 노력과 세밀함을 기울여야 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에서 사도들이 구현했던 ‘보편성의 근거’의 올바른 이해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게 되었다.

이점에 있어서 할키돈 공의회는 전 세계 교회가 따르게 된 기독교적 해법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원칙으로 남아

이미 제4차 세계공의회 소집을 둘러싼 서로마 제국 군주들과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간의 사전 교신 속에서, 로마 교황이 전 세계 교회의 우선권자라는 다소 불분명한 표현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의 서신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불린다. “예로부터 모든 이들 위에 성직의 우선권을 인정받은 도읍 로마의 가장 복된 주교”, “그는 신앙과 성직자들에 관해 심판할 지위와 권한을 가져야 한다”, 또 모든 일을 심사한 뒤 “믿음과 참된 신성(神性)의 이치가 요구하는 판결을 내릴 자”라고 표현되었다.[1]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아노스 대주교의 “성직의 합당함으로서” 복직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사도좌에서 심판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2] 같은 내용은 그녀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누이 풀케리아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반복된다.[3] 이처럼 당시 동방의 주교들은 거의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황실의 서신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그저 예로부터 로마 교회의 사랑 안에서 ‘으뜸’으로 간주되던 주교에 대한 존중의 표현 이상은 아니었으나, 레온 1세 교황의 특사들은 확신에 차 있었고, 공의회에서 레온 1세 교황을 대표하여 발언하면서 공의회보다 교황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공의회의 진행을 주도하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교황특사들은 로마 교황을 “모든 교회들의 대주교”, “모든 교회들의 수장”이라고 부르며, 그의 권위 없이는 어떤 공의회도 열릴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황특사들의 이러한 권력지향적 태도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첫 회기에서 그들은 먼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의 공의회 회원 자격 박탈을 최후통첩적 어조로 요구하며 말하였다. “이는 ‘모든 교회들의 수장, 도읍 로마의 주교’가 요구하는 바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떠날 것이다.”[4] 국가 당국 측의 대표들이 이유를 묻자, 루첸티우스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디오스코로스는 자신에게 없는 심판권을 행사하였고, 사도좌의 권위 없이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일찍이 있어본 적도,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5] 이 모든 교황특사들의 발언은, 교회에서 명예상 첫번째로 여겨지는 주교에 대한 단순한 존경 표현이 아니라, 로마 주교의 수위설에서 도출된 엄격한 논리적 결론들이었다. 루첸티우스 주교는 이 이론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자기 발언 속에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디오스코로스가 사도좌의 권위 없이 감히 소집했다고 그가 주장한 그 공의회란, 사실 449년의 ‘강도 공의회’였으며, 그 자리에는 바로 같은 교황 레온 1세의 특사들이었던 푸테올리의 주교 율리아누스와 보제 일라리우스가 참석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인지와 참여 아래 개최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어서 공의회에서는 디오스코로스 단죄 선언문이 거만한 태도가 반영된 장중한 어조로 교황특사들에 의하여 공포되었다. 여기서 디오스코로스에 대한 비난은 주로 규율에 위반되는 죄와 디오스코로스가 감히 교황 레온을 파문하려 했다는 점으로 요약되었다. 이 선언문에서는 디오스코로스가 신앙에 대하여 범한 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선언문은 또한 교황주의적 이론의 정신을 반영하듯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위대하고 유서 깊은 로마의 밝고 복되신 대주교 레온께서, 보편교회의 반석이자 확증이며, 정교신앙의 기초이신 지극히 복되고 칭송 받는 사도 베드로와 더불어, 우리를 통하여 그리고 이 거룩한 공의회를 통하여,

공의회의 신조가 마련되고 그 초안이 처음 등장했을 때, 레온 1세의 서간이 초안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음을 본 교황특사들은, 레온 교황의 서간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에게 귀환장을 발급해 줄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였다.[7] 인용한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선언들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와 특사들이 이를 공의회에 전달한 태도와 어조 속에는 로마 주교의 우월성, 그의 심판의 항소불가성, 그리고 그의 규정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의식이 스며 있었다. 특사들의 이러한 발언의 성격은 레온 교황 시대까지 형성된 로마 주교 수위설에서 논리가 도출된다. 4세기 중엽까지 이 이론은 미완성되고 산발적인 생각들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대 레온 교황은 이를 완전한 체계로 표현하여 자신의 서품 당일 이탈리아 주교들 앞에서 행한 설교 속에 제시하였다. 이 전형적 체계의 주요한 요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성 베드로 사도는 모든 사도들의 제일인자(Princeps)이며 권세에 있어서도 모든 다른 사도들을 능가하는 자이며, 모든 주교들의 으뜸(Primas)이고, 모든 양떼에 대한 보살핌과, 교회의 모든 목자들에 대한 배려가 그에게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사도직·성직·목자직의 모든 은사와 특권은 완전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졌으며, 이미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다른 사도들과 목자들에게 그것들을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베드로 사도의 수위(首位; Primatus)는 일시적 제도가 아니라 항구적 제도라는 것이다. 넷째, 로마 주교들과 수사도(首使徒)와의 친교는 매우 밀접하여, 새로 선출된 주교마다 베드로좌에서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며, 그로부터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은총의 능력이 그의 계승자들에게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레온 교황에게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이 도출된다. 1) 모든 교회가 베드로의 굳건함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이 굳건함에서 떨어져 나가는 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 교회의 신비체(神秘體) 밖에 두는 것이다. 2) 로마 주교의 권위를 침해하고 사도좌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자는 복된 베드로 사도에게 속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3) 베드로 사도의 권세와 수위를 거부하는 자는 그의 존엄을 조금도 깎아내릴 수 없으며, 오히려 교만의 영에 들떠 스스로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8] 바로 이러한 수위권에 관한 교황주의적 관점이 레온 1세 교황의 특사들이 공의회에서 한 발언들의 기저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이 이론에서 명백히 도출되듯, 특사들이 제4차 세계공의회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했는지, 그리고 교회의 최고 권력에 관한 기독교 교리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도 분명해진다. 우리는 레온 교황이 구성한 로마 교황직(Pontificatus)의 수위권 이론에 대한 신학적 분석[9]에 멈추지 않고, 이 문제의 역사적 측면, 즉 제4차 세계공의회가 로마 주교의 이러한 관점들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할키돈 공의회 전체와 그 시대의 동방교회 전체는, 그러한 체계의 출현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하였다. 적어도 동방 교부들의 발언들에서는 그들이 새로운 교황주의 이론과 접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말씀 안에서 그 이론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동방은 세계공의회 시대에 자신들의 내부 생활에만 전적으로 몰두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격렬하고 창조적인 신학적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곳에서 이단들이 등장했으며, 바로 이곳의 세계공의회들에서 그것들이 규탄되고 부정되었으며, 하느님의 영감에 의하여 성경과 성전(聖傳)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가 규명되었다. 이러한 작업에 몰두해 있던 동방은,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거의 분리되어 있었던 서방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공의회 참석자 대다수가 이러한 이론의 출현을 알지 못했으며, 특사들의 모든 유별난 발언들에 대해 자신의 품위를 의식하며 관대하게 대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온 1세 교황이 공의회를 이탈리아에서 소집해 달라고 강력히 청원했음에도, 그리고 그것이 제국 서부의 황실 구성원들에 의해 지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4차 세계공의회는 황제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서방이 아니라 동방, 곧 할키돈에서 소집되었다. 공의회 참석 교부들은 토론에서 특사들의 발언들에 매우 절제된 태도로 임하였다. 첫째는, 그러한 발언들의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발언들의 내용, 예컨대 디오스코로스에 관한 내용이 공의회 전체의 분위기와 방향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10] 레온 1세 교황의 서간이 구세주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결합 문제와 관련된 한, 그 서간은 내용에 있어서 정교적이었고 거부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서간의 채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먼저 서간을 낭독하고 그것이 엄격히 정교적임을 인정한 뒤 표결로 확정하였다.[11] 따라서 공의회는 그 서간이 교황의 붓끝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의 본질에 의해 정교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공의회는 또한 특사들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 대한 판결의 표현을 제시했을 때, 특사들의 성향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주교좌들의 중대성에 따른 서열로, 거의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되 다만 베드로 사도를 “보편교회의 반석이자 굳건함, 그리고 정교신앙의 기반”이라고 하는 고백만 생략하여 판결을 내렸다. 예컨대 키지코스의 주교 디오게니스는 “그러므로 본인 또한… 지극히 거룩하고 복된 로마의 레온 대주교의 결정과, 지극히 거룩하고 복된 황도(皇都)인 신 로마의 아나톨리오스 대주교의 결정, 그리고 거룩한 본 세계공의회의 결정에 따라…”라고 말하였다.[12] 이러한 방식의 공의회 구성원들의 사적 선언의 표현은, 특사들이 그들의 선언 속에서 강조했던 로마 주교좌의 우월한 중대성이라는 경향을 마치 상쇄시키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공의회 규범 제28조

그러나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황특사들이 어디에서든 로마 주교좌의 우선적이고 지도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욕망을 분명히 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그들은 교회 관계를 바로잡고 보편 교회 안에서 로마 주교좌의 실제적 지위와 의미를 분명히 밝히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회는 규범 제28조를 제정함으로써 그 진행의 후반부에서 이를 실현하였다.

이 규범은 지대한 역사적·법적 의미를 가진다. 공의회가 이 규범을 확정했을 때, 로마 주교가 강하게 항의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 규칙 안에서, 오직 세계공의회만이 알고 있으며 심지어 총대주교들 자신조차 그 권위 아래 있는, 총대주교 권한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교회의 최고 행정권의 단호한 손길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부 성직자들은 그와 같은 ‘오만한 정신’에 미혹되어 이 규범을 재검토하려 하고, 자신들의 야심찬 열망을 정당화할 무언가를 그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규범 제28조의 형성 역사와 그 본질을 밝히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 대한 지적

이 규범은 그 주요 대상으로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다룬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는 제2차 세계공의회(381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교회 법규 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2차 공의회의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새 로마,” 즉 “황제와 원로원의 도시”의 주교라는 지위를 고려하여, 규범 제3조를 통해 옛 수도 로마의 주교와 동등한 명예를 부여하였으나, 서열에 있어서는 그에게 두 번째 지위를 배정하였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명예를 높인 유일한 이유는 그의 주교좌가 위치한 도시, 즉 정치적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이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단순한 대리주교에서 총대주교좌로 상승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적 의미 덕분이었다. 그러나 제2차 공의회의 규범 제3조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 큰 명예만을 부여했을 뿐, 어떠한 권력도 부여하지 않았다.

제2차부터 제4차 공의회에 이르는 70년의 동안, 세속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행정적 영향력은 주요 주교들뿐 아니라 다른 관구장주교와 주교들의 눈에도 점차 커져갔다.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황궁과 최고 민정 기관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 주교들 사이의 일종의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업무를 몇몇 콘스탄티노플 주교들이 능숙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였고, 또한 그들이 황궁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은 인접 교구들의 일에 위법적으로 개입하는 넓은 활동 범위를 갖게 되었다. 역사에는 제2차 공의회의 규범 제3조가 정한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권한 확대를 보여주는 사례가 많이 있다.[13] 예컨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98~405) 시대에도 콘스탄티노플 교구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그 권한은 28곳의 속주(屬州; Provincia)들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로마 주교 보니파티오스 1세(418~422) 재임기에는 동(東) 일리리아를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 소속시키려는 시도까지

그러나 이 시기 콘스탄티노플 주교좌는 제4차 세계공의회 당시인 아나톨리오스 대주교 재임기에 가장 큰 중요성과 힘을 갖게 되었다. 규범 제28조가 공표되기 전 이미, 공의회의 한 회기에서 아나톨리오스 대주교가 안티오키아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하는 티로스의 포티오스와 베이루트의 에브스타티오스 두 주교의 사건을 심리하려 했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었다.[15] 이와 같은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행동들은 모두 허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그는 특권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특수한 지위를 일정한 교회법의 틀 안으로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제4차 세계공의회의 규범 제28조를 통해 실현되었다.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의 권한 범위를 확정하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전 세계의 총대주교들 가운데 제2위의 명예를 인정한다는 결정을 재확인하고, 그의 관할권을 폰토스, 아시아, 트라키아 등 세 개의 교구들(Dioceses)로 한정하였다. , 공의회는 규범 28조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관할해야 지역을 명확히 지시함으로써 권한의 경계를 설정한 것이다. 이로써 공의회는 그동안 형성되어 콘스탄티노플 주교들의관행 공적 승인(sanctio) 부여하였으며, 관행 내용은 앞서 언급한 지역의 관구장들을 서품하고, 또한 지역에 거주하던 이민족들을 위한

이러한 방식으로, 독립된 사도적 교회들 가운데 일정한 영토적 경계와 지위를 갖춘 새로운 총대주교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이 바로 새로이 설치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의 본질임을, 공의회는 교황 레온 1세에게 보내는 문건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폰토스·트라키아 지역의 관구장주교들을 서품해 온, 하느님의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오래전부터 지켜와 유효한 그 관행을 우리는 공의회 결정으로 확정하였으니, 이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 새로운 권한을 부여함이 아니라, 관구들의 질서를 견고히 하려는 것이다.” [16] 아나톨리오스 대주교 역시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폰토스, 아시아, 트라키아의 관구장들을 서품하되, 그 지방의 다른 주교들까지 서품하지는 않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지난 60~70년 동안 행사해 온 서품권의 일부를 상실하게 됩니다.”[17] 또한 교회법 주석가 요안니스 조나라스 더욱 명확하게 말한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모든 주교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소속된 이들에게 있어서만 재판관으로 세워졌다. 그는 시리아, 팔레스티나, 페니키아, 또는 이집트의 주교들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자신의 재판정에 회부할 수 없다. 시리아의 주교들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재판을, 팔레스티나의 주교들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재판을, 이집트의 주교들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들은 해당 총대주교로부터 서품되고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18]

따라서, 규범 제28조는 그 구조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에서 제4차 세계공의회의 교부들은 제2차 세계공의회의 규범 제3조를 확증하는데, 곧 로마 주교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명예의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예 상의 이러한 동등성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바로 두 주교좌가 자리한 도시들의 정치적 중요성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세계적 수도로까지 승격되는 역사적 과정은, 제2차 세계공의회의 교부들이 과거에 옛 로마의 역사·정치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로마의 주교를 명예와 서열에서 제1위로 인정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도 공번적 명예의 우선권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규범의 이 첫번째 부분은 로마의 주교와 동방, 즉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 모두 적용되는 일종의 역사적·국가적 근거를 가질 뿐이며, 결코 교의적 근거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규범 제28조의 이 부분에는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의미를 보아서도 안 된다.

규범 제28조의 두 번째 부분은, 그 근거를 전적으로 행정적 조처에 두고 있으며, 이는 새로 형성된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의 지리적 경계를 정확히 지정하는 것으로, 오직 그 영역 안에서만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관할권이 유효함을 지적한다. 이 규범의 가장 문자적인 의미도, 규범을 제정한 공의회의 의식(意識)도, 그리고 후대의 교회법 전문가들의 주해서도, 결코 다른 방식의 이해를 위한 어떤 선례도 제공한 적이 없다. 세계교회 내 최고 행정 당국으로서 제4차 세계공의회는 규범 제28조로써  매우 일관되고도 권위 있게 첫째,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대교구를 창설하였고, 둘째, 모든 대주교, 총대주교들에게 세계교회 안에서 그들의 명예상 지위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이러한 제시에 따라 세계공의회는, 교회의 최고 권력 당국으로서 새로운 대교구의 경계를 설정할 권리와, 독립교회들의 명예상 지위를 지정할 권리가 세계공의회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언급된 규범은 레온 1세 교황의 특사들을 제외한 공의회 전체에 의해 승인되었다. 교황특사들은, 이 규범 안에서 콘스탄티노플 주교들이 동방의 주교들 위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보았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교회 안에 논쟁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단성론자들 사이에서는 레온 1세가 공의회의 네스토리우스주의적 결의안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 사안에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개입하여, 교황에게 공의회의 모든 결의안에 대한 서명 여부에 관해 분명한 답변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교황은 이에 동의하였고, 동시에 자신은 결코 주저함을 표현할 생각조차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규범은 교회 생활 안으로 도입되었고 사안은 통상의 절차대로 진행되었다.[19]

결말

이와 같이, 제4차 세계공의회는 규범 제28조를 제정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공번적 관할의 제도가 승리하게 하였다. 공의회는 새로운 총대주교청을 설립하였으며, 이 행위에는 교회 전체 위에 어떤 권력적 우위를 부여하는 전제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로마 주교에 관해서는, 공의회 교부들은 이 규범에서 옛 수도 로마의 주교로서 그가 누리는 명예 상의 우선권을,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와 동등한 것으로만 강조할 뿐이었다.

공의회는 로마 주교 그 자신을 콘스탄티노플 주교와 명예상 동등한 자로 간주하며, 그의 어떤 우월성 속에서도 교의적 성격의 근거를 찾지 않는다. 이러한 공의회의 결의안에 파스하지오스 주교는 항의하면서, 니케아 공의회를 지적하여 그 공의회가 로마 교회의 우월성을 영원히 확증하였고 이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제1차 세계공의회(325년)의 규범 제6조를, 로마 교회에 유리하게 왜곡된 형태의 본문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공의회 서기관 콘스탄티노스는 동방의 모든 교회들에서 동일하게 온전히 보존되어 온 규범 제6조를 읽어 들려주었고, 이로써 1차 공의회 규범의 라틴어본에 삽입된 첫 문구들이 위조라는 것이 밝혀졌다.[20] 공의회는 이러한 상이한 독해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교황특사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본 공의회의 결의안을 승인하였다. 이렇게 교황 레온 1세의 특사들이 제4차 세계공의회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실현하려던 모든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공의회는 모든 결의안을 독자적으로 진행했을 뿐 아니라, 세계교회 안에서의 로마 주교좌의 지위 자체를 지정하는 것이 본연의 의무로 여겼으며,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를 명예상으로 옛 로마의 주교와 동등한 수준으로 승급시킴으로써, 이러한 행위들이 교회에서 정당하게 행해질 권한은 오직 세계공의회에만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공의회의 이 결의안은 교회 안에서의 공번적 원리의 진정한 승리였으며, 교황에 의해 드러난 수위권 지향에 대한 단죄였다.

동일한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파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가 교회 안에서 명백하고 노골적인 권력 장악을 시도한 것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는 공번적 질서를 뒤흔들었고, 거룩한 교회에 자신의 뜻을 모든 수단을 통해 강요하려 했으며, 자신의 인간적 정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의 자리에 놓으려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개성을 고려하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역사는 디오스코로스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선출되기 전의 그의 전기를 전혀 알지 못한다. 분명 그는 이집트인 출신이었으며, 신념 면에서도 편협한 민족주의자였을 것이라 추정할 근거가 있다. 학문적으로 디오스코로스는 신학 지식이 뛰어나지 않았고, 신학적 저술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단호하고 거칠며 권위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가 이끌던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획일적이었다. 그 교회는 이집트 전역에서 유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은 전 이집트의 대주교였으며, 모든 주교들은 그 자신이 직접 또는 그의 대리로서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에 의해 서품되었다. 교회 생활의 모든 줄기들은 사도 마르코의 주교좌로 모여들었고, 이집트인은 자신의 주교를 대단한 경건한 자세로 바라보는 데에 익숙하였다.[21] 디오스코로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청을 무제한적 세속 전제군주의 방식으로 다스렸다. 공의회에 제출된 보고서들과 공의회 진행을 통해 드러나듯이, 디오스코로스는 사적인 목적으로 자신에게 불만스러운 이들을 가혹하게 박해하였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전임자 성 키릴로스의 친족들까지도 무자비하게 박해하였으며, 황궁에서의 광범위한 연줄까지 활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황궁의 실권자 환관 크리사피우스와 잘 알고 지냈는데, 그는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단성론파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22] 그뿐 아니라, 디오스코로스는 마르키아누스 황제 즉위 시 새로운 군주에 대항한 알렉산드리아 봉기를 선동하는 무모한 시도까지 감행하였는데 이 기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정부는 자신의 의무를 망각한 대주교를 처벌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23] 도릴레온의 에브세비오스 주교가 기록한 바와 같이 디오스코로스는 음모의 기술을 익혔고, 돈의 힘을 알고 있었다.[24] 그는 거룩한 교회의 저명한 수호자들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정교 총대주교들의 위대한 권위와 명성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자신을 공의회의 권위에 의해 심판될 수 없는 존재로 선포하고”, 세계공의회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었다. 디오스코로스는 이와 같은 조치들을 통해, 교회의 내적 자유의 견고한 보루였던 세계공의회들에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25]

당시 교회의 역사적 정황은 디오스코로스의 구상에 매우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도시 내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에브티키오스 대수도사제가 신봉하고 설교하던 새로운 단성론 이단이 명백히 모습을 드러냈다. 에브티키오스를 잘 알고 있던 도릴레온의 주교 에브세비오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 지역공의회에서 그의 이단적 가르침에 맞서 일어섰다.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아노스 대주교가 주재한 공의회는 이 문제를 면밀히 심리하였고, 정교 신앙과 교회의 법적 규범에 따라 그 이단을 단죄하였으며, 회개하지 않은 에브티키오스에게 성직품을 박탈하고 수도원에서도 추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관할주교의 합법적 조치로 단죄된 이단이 실제로 드러난 것처럼 그토록 큰 힘과 광범한 확산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브티키오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레온 대주교, 디오스코로스 주교,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시민사회에 서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환관 크리사피우스를 통하여 황제에게까지 플라비아노스 대주교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써 문제는 교회 내부의 영역에서 궁정 내 암투와 개인적 이해관계가 얽힌 영역으로 옮겨졌다. 교회사는 크리사피우스가 플라비아노스 대주교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실을 간략히 전한다. 즉 플라비아노스가 대주교좌에 오를 때, 크리사피우스가 요구한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26] 크리사피우스는 즉각적으로 에브티키오스 편에 서서 단성론 가르침을 비호하였고, 아마도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플라비아노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황실 측에서는, 플라비아노스 대주교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새로운 가르침을 도입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독설에 가까운 비방)이 제기되고 있었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 교리를 통해 네스토리오스 이단을 부활시키고, 또한 에브티키오스를 위법적으로 파직했다는 것이었다. 크리사피우스의 영향을 크게 받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도 이러한 주장에 휘둘렸다. 황제는 영적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며 의지도 약하여 음모에 쉽게 넘어갔다. 신앙 문제에서의 전반적 혼란을 잠재우고, 네스토리오스주의 혐의로 고발된 플라비아노스 대주교를 파직하며, 에브티키오스를 다시 성직에 복직시키기 위해 황제는 공의회 소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방향으로 공의회를 이끌어갈 적임자가 교계 내부에서 필요하였다. 디오스코로스는 크리사피우스와 궁정의 다른 음모가들과 사적 연관이 있었다. 또한 그는 알렉산드리아(황제의 중요한 통치 영역)의 대주교였으므로 자연히 황실과 가까웠다. 에브티키오스의 단성론적 교리에 대한 디오스코로스의 성향은 그를 공의회 운영의 핵심 인물로 추천하는 데 충분했다. 디오스코로스는 권력에 대한 자신의 야심에 부합하는 이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 점차 우위를 확보하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거의 경시하고는, 이번 공의회를 그와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동방 전체를 제패하려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공의회는 449년 에페소스에서 소집되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칙령에서 교회법에 어긋나게도 디오스코로스에게 “테오도리토스뿐 아니라 본 공의회에 모든 참석자 위에 권한과 우위를” 부여하였다.[27] 디오스코로스는 자신에게 소속된 이집트 주교들과 단성론 성향을 띄고 네스토리우스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시리아 수도사들을 이끌고 공의회에 나타났다. 디오스코로스는 공의회 교부들에게 테러를 가하였다. 그는 설득과 더불어 물리적 강압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결정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28] 플라비아노스 대주교가 완곡하게 표현했듯이, 디오스코로스는 이곳에서 “권력의 우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공의회는 교회사에 ‘강도공의회’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플라비아노스 대주교는 구타로 인해 임종하였고, 로마의 대 레오 교황은 파문당했으며, 단성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동방 교회 전체 위에 디오스코로스가 군림하였다. 이는 참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위대한 사도적 통치 원리, 즉 공번성에 대한 일종의 음모였다.

이와 같이 노골적이고 난폭하게 교회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사실을 제4차 세계 공의회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키돈 공의회는, 보편교회 전체가 교회 자체에 대한 무서운 위협을 보게 되었을 때, 그리고 궁정 내의 막후 음모를 지양하는 새로운 국가정치적 국면이 형성되었을 때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630명이라는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전 세계의 교회를 대표하였고, 그 주최 측은 완전히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보장하고 모든 형태의 강압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에브티키오스의 이단은 단죄되었고, 디오스코로스는 그의 권력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파직되었다. 이 사실을 통하여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의 최고 행정권의 유일한 초대교회 사도들의 원리가 바로 공의회라는 것을 장엄하게 확인하였다.

위의 두 사례는 거룩한 세계 교회의 통치에서 공번성의 원리를 훼손하려는 중대한 시도들이었다. 이에 대해 할키돈 제4차 세계공의회가 내린 결의들은, 고대의 사도적 세계교회가 그 전체 위에 단 한 사람의 주교에게 수위권을 부여한다는 어떠한 교의적 근거도, 어떠한 법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도적 전통에 따라 공번성의 원칙을 바탕으로 교회의 통치를 조직해 왔다는 사실의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부교수 N. 무라비요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기관지 1951년 제7호.

[1] Деяния, т. III, стр. 91—92, изд, Казанской Духовной Академии, 1863 г.

[2] Там же, стр. 94.

[3] Там же, стр. 97.

[4] Деяния, т. III, стр. 141—142.

[5] Там же, стр. 142.

[6] Там же, стр. 602—603.

[7] Там же, т. IV, стр. 97.

[8] Проф. В. В. Болотов. Лекции по Истории древней Церкви, т. III, стр. 208—285.

[9] Подробный разбор теории папства см. в докторской диссертации бывш. ректора Московской Духовной Академии архиепископа Гермогена.

[10] По изысканиям Гефеле, Диоскор даже оставлен был на Соборе, но только исключен из состава голосовавших. Это удовлетворило легатов папы.

[11] Деяния, т. III, стр. 541.

[12] Там же, стр. 604.

[13] Проф. В. В. Болотов. Лекции, т. III, стр. 222—227.

[14] Там же, стр. 227.

[15] Деяния, том. IV, стр. 74.

[16] Там же, стр. 402.

[17] Гефеле, История Собора.

[18] Толкование Зонары на 17-е правило IV Вселенского Собора. «Ж.М.П.», 1949, № 12, статья проф. С. В. Троицкого, стр. 31.

[19] Проф. В. В. Болотов. Лекции, т. IV, стр. 309; Робертсон, История Христианской Церкви, кн. III, стр. 129; Гефеле (История Соборов) утверждает, что Трулльский собор в 80 г. 36-м правилом подтвердил 28-е правило, а папа Иннокентий III на Латеранском Соборе в 1215 г. буквально повторил 28-е правило в отношении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ьского патриарха.

[20] Деяния, т. IV, стр. 374—375.

[21] Проф. В. В. Болотов, Лекции, т. IV, стр. 321.

[22] Деяния, т. III, стр. 573.

[23] Деяния, т. III, стр. 590—-594. Болотов В. В., «Из истории Египта» (Христианское чтение, 1884, г., стр. 724).

[24] Деяния, т. 111, стр. 144 и 578.

[25] Проф. Болотов В. В. «Из истории Египта» (Христианское Чтение, 1884, стр. 723). Лекции, т. IV, стр. 266.

[26] Робертсон. История Христианской Церкви, кн. III, стр. 111, примеч.

[27] Деяния, т. III, стр. 158—159.

[28] Проф. В. В. Болотов. Лекции, т. IV, стр. 263.